India/'09-'10 India

바르깔라(varkala)

kai.lasa 2019. 2. 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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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사고가 났다. 그 날 아침만 해도 일출 보면서 신나서 노래부르면서 가다가 차가 별로 없는 일직선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데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다 앞 차가 정지한 건 줄 모르고 들이받았다. (앞 차 브레이크등이 나가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저속으로 가다 부딪혀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쌩쌩 달리다 박았으면 훨씬 더 심하게 다치고 바이크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차를 들이받고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내가 다쳤는지도 몰랐는데 오른쪽 팔이 부러진 것 같다. 오토바이랑 짐은 내팽개치고 릭샤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천만 다행으로 사고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종합병원 같이 큰 병원이 있었다. 인적 없는 산길을 달린 적도 엄청 많았는데 그런 곳에서 사고 났으면 병원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엑스레이 찍고 검사 받아보니 팔이 부러진 건 아니지만 탈골이 됐고, 팔꿈치 뼈가 부서져서 조각조각이 났다고 했다. 몇 시간을 끙끙대며 기다렸다 수술하고 일어나보니 깜깜한 밤이 되었다. 마취 풀려서 눈 뜨자마자 보인 건 간호사 얘들이었다. 외국인 여자애가 온 게 신기했는지 서 너 명이 몰려와서는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나한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


팔을 다치는 바람에 몰디브에 가려던 계획은 날아갔고, 한 군데 머무르며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바르깔라에 6주간 머무르게 됐다. 


varkala-cherthala


솔직히 바르깔라는 시끌벅적한 고아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는 가게도 하나 없었고, 내가 바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풍덩 뛰어들 수 있는 바다가 무척 가까웠다. 


6주 동안 무엇을 했더라? 매일 아침 우유와 계란, 토마토 등을 사다 토스트를 만들어 먹고, 생강차도 많이 끓여마시고, 미드를 몰아보기도 하고, 영어 공부를 좀 하기도 했다. 팔이 붓고 흔들리면 아파서 많이 걷지는 못하는 대신 근처만 살짝 살짝 걸어다니기도 했다. 계획한 대로 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아까운 시간을 6주나 허비한다는 것에 울화통이 터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쉬어가라고 그랬던 것 같다. 마음 한 켠 어딘가에는 '빨리 빨리, 더!'라는 마음이 남아있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말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다시금 알게 해 주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cherthala-varkala


바르깔라에서의 6주. 

이 곳에서 딱 한 번, 단 몇 초간 만났을 뿐인 마음 깊은 청년.

그리고 옆 방의 빅터 부부에게 한국 카레를 대접하고, 동방미인 차를 같이 내려마시며 이야기 나눈 일.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화가 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을 향해 가는데 나만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을 때 바르깔라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그냥 그래도 되는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함이 차 오르고, 충전을 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멈춰있어도 긴 인생에 있어서 별반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둥바둥 애를 쓰든, 아무 것도 안 하고 숨만 쉬며 지내든 삶은 그저 흘러갈 뿐 거기에 평가를 하고 점수를 매기는 건 내 마음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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