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2.11.22.
일정 클룩(호로그) - 알리초 - 무르갑
어제 거의 저녁 8시부터 자기 시작해서 오늘 6시 좀 안되어서 일어났으니까 거의 열시간을 잤다!! 하긴 그 전날 란가르에서 12시에 깨고 불안감에 시달리며 잠 못자다 새벽에 일어나고 못 잤던 것에 대한 보상인가보다. 모닝커피 한 잔 마시면서 어제 못 쓴 일기 쓰니까 7시가 되어간다.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는 숙소에서 샤워하고 오늘 하루를 맞이해야지! 오늘로 파미르 여행 5일째. 여행의 절반으로 접어든다.

아침 8시 정도에 식사를 하고 9시에 알리가 와서 출발했다. 무르갑으로 고! 오늘 가는 길은 아무 문제 없이 갈 수 있기를...

오늘은 내가 앞자리에 앉았다. 앞자리는 시야가 탁 트이고 옆의 창문으로도 볼 수 있고 촬영하기가 훨씬 좋다.

어제 길이 막히기 전까지는 설산의 향연이었는데 오늘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을 지났다.

내려서 신나게 사진 찍다 4,200m에서는 마르씽이랑 제니네 차도 내려서 같이 사진 찍고, 오리스랑 알리는 차 뒤에 붙잡고 썰매 놀이하고 애처럼 신나게 놀았다.



여기 가는 길도 충분히 멋지고 예뻤는데 무르갑 디스트릭트에 들어서니까 이건 뭐 장난이 아니다.


무르갑에 가지 않으면 파미르에 가지 않은 것과 같고 무르갑이 달 표면과 같다고 한 말이 뭔 말인지 알겠다. '황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풍광들을 보느라 오늘은 잠 한 숨 안 자고 계속해서 사진 찍고 영상으로 남겼다.


이렇게 여행할 때에는 나중에 지구를 떠날 때 조금 그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풍경이 눈물나도록 아름다워서 벅차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오고 싶었던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고, 진실로 현재 - 지금밖에 없구나 싶다. 한국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떠올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걸 알기 위해 온 걸까?

알리초(Alichor)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여기도 느낌이 참 희한했다.

저 멀리 황량한 산이 보이고 집은 몇 채만 있다. J의 표현을 빌자면 이곳의 집들은 성냥갑처럼 네모나게 생겼다. 추위 때문에 지붕도 없이 단층으로 단순하게 지은 집들만 덩그러니 몇 채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정말로 움직이는 것이 별로 없다.

눈을 뗄 수 없는 멋지고 황홀한 풍경 속을 달리다 무르갑 마을에 도착했다.


황량, 삭막, 황홀, 경외
L과 J는 황량한 이곳에서 텐트 치고 멍 때리고 싶다고 했다. 다른 생명체가 없으니까 지구가 아니라 다른 별 같은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폭 싸여진 모양이라 아늑한 느낌마저 든다.





이 멋짐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냥 그것. 말로 채울 수 없는 그냥 '그것'과의 간극. 나도 그렇고, L과 J도 그렇고. 그 풍경을 보고 감동을 느꼈던 것은 우리 모두 ‘나’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벅차오르고 황홀했나보다. 늘 찾고 있고, 그리워하던 나를 만났으니까.



무르갑 마을은 꽤 규모가 컸다. 점심 식사를 한 알리초 마을의 몇 배는 된다.


거대한 산 속에 폭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성냥갑 같은 집들이 무척 많았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방 안에 석탄 난로가 있어서 무척 따뜻하다! 개인 침대가 4개 있는 방에 묵게 되었는데 가장 춥고 환경이 열악할 줄 알았던 곳이 석탄 난로 덕에 따뜻하고 포근해져서 숙소도 대만족이었다.



잠깐 밖에 나가 산책하다 방에 들어와 백차를 내려마셨다.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이제까지 먹었던 것 중 가장 담백한 식단이다.

스프는 고기가 덜 들어가서 훨씬 덜 느끼했고 감자, 양배추, 당근이 들어가 있으니까 좋다! 이걸로 식사가 끝인 줄 알았는데 밥, 야크 고기가 일인당 한 접시씩 나와서 우리는 셋이서 하나를 같이 먹겠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이 아니고 양 고기가 또 나와서 우리는 손도 못 댔다. 타지크 사람들은 먹을 걸 참 풍성히 준다 ^^

마르씽과 제니는 내일 아침 7시에 식사하고 두샨베까지 최대한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쏜다고 했다. 제니는 그 동안 외국인 여행자들만 만났는데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했다고 마르씽이 얘기해줬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난 거지만 두 분 다 멋지고 좋은 분들이라 아쉬워져서 제니랑 포옹 한 번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L과 J가 내 덕분에 이런 곳에 오게 되어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고마운 건 나다. 혼자였어도 혼자 있는 고독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지만 같이 있어서 더 즐겁고, 좋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니 즐거움이 몇 배가 되어 진실로 감사하다.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같이 여행다니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L과 J와는 네팔 트레킹을 함께 할 수 없고 몽골에 말 타러 가는 것도 할 수 없다. 기회가 허락할 때 같이 많이 다녀야겠다.
나중에 부모, 형제자매와 이별하고, 가까운 사람과 이별하고, 가이드와도 이별하고, 부처도 예수도 스승도 버리고 정말로 혼자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무척 슬프고 아쉽겠지?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겠다. 만나는 모든 인연에 마음을 다하고, 진심을 전하고, 헤어짐의 순간이 왔을 때 행복을 빌며 축복해줄 수 있도록 모든 만남과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처음 여행 떠났을 때와는 달리 지금 드는 생각은 '순간에 최선을 가까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이다. 고맙습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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