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시 2024.06.09-11.
코스
◆ Day 1. 구례구역 - 화엄사 - 코재 - 노고단
◆ Day 2. 노고단 - 연하천 - 벽소령 - 세석
◆ Day 3. 세석 - 촛대봉 - 세석 - 한신계곡 - 백무동
첫째날
어떤 일을 갑자기 충동적으로 결정할 때가 있다. 여행은 특히 더 그런데 발단은 노고단대피소 사진이었다. 노고단대피소가 캡슐형(독립형)으로 리모델링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중에 한 번 묵어보고 싶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노고단대피소에 사진을 보고 바로 대피소를 예약했다.
노고단에서 묵어야했기에 새벽에 떨어지는 성삼재행 버스는 탈 수 없었고 (시간이 너무 많이 빈다.) 반대쪽에서 와서 성삼재나 화엄사에서 끝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서울 올라가는 교통편이 불편했다. 결국 구례구역으로 가서 화엄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용산역 7:10 - 구례구역 9:40 (소요시간 2시간 반)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화대종주야말로 진정한 지리산 종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첫 지리산 산행은 화중종주였다. 네팔에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네팔 롯지에서 묵는 것처럼 산에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산 타면서 산에 오래 있을 수 있는 건 지리산밖에 없었다. (텐트 들고 백두대간이나 정맥, 지맥하면 오래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 때는 그런 정보가 없었다.)
그 때는 구례구역에서 버스타고 구례버스터미널로 가서 다시 화엄사 입구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타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버스 갈아타고 이동할까 하다 시간을 절약하기로 하고 구례구역에서 화엄사까지 택시를 탔다.
(구례구역 - 화엄사 / 택시 15분, 약 17,000원)
구례는 추억이 있다. 10년도 전에,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가 구례로 내려가 1-2년간 살았다. 그 때 친구 볼 겸 몇 차례 놀러 갔었는데 섬진강이 굽이치는 구례는 고즈넉하고 예쁜 마을로 기억됐다.
택시 기사님이 말씀하시길, 구례에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응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고 땅값이 너무 비싸다고. 나중에 지리산 자락에 마음이 드는 곳이 생기면 일년 살이를 먼저 해 보고 결정해야겠다.
화엄사가 눈앞에 있으니 들렀다 가기로.
화엄사에서 올라가는 길은 예전에 왔는데 어쩜 이렇게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날까? 탐방로 시작 포인트가 어디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길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거라곤 코재 부근이 무지막지하게 힘들었다는 것. 해 떨어지고 너무 늦게 도착할까봐 여유롭게 쉬지 못하고 부랴부랴 올라갔다는 것.
화엄 계곡을 따라 걷게 되는데 처음에는 길도 완만하고 대나무숲이 이어진다. 7암자 순례길과도 이어져서 등산객 말고 가볍게 산책하시는 분들도 많이 봤다.
어진교를 지나 어은교 옆 계곡을 보니 돌탑이 많이 쌓여있다. 돌탑은 아무 곳에나 쌓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신령스럽다고 해야 하나? 귀신같이 기운이 좋은 곳에만 쌓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일부러 여기에서 쉬었다. 아점으로 삼각김밥 먹고, 커피랑 디저트 쿠키도 먹고. 찬물에도 잘 녹는 커피라 마시기 너~무 편하다.
다음에는 한참동안 산죽숲?이 이어졌다. 계곡에서도 그랬지만 오늘은 몸이 힘들어서 정신이 나가버리기 전에도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 멍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계곡물이든, 바위든, 나무든, 풀이든 나는 외부 대상을 바라보지만 마음에 한 조각의 출렁임도 없는 잔잔하고 멍한 상태. 참 깔끔하고 좋은 기분이다.
그 다음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올라갔더라?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지리산에 한 번 더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지리산! 하면서 그저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비건 에너지바도 먹고 물도 마시고 잠깐잠깐씩 쉬어주며 갔는데 한참동안 너덜지대를 올라갔다.
순간 과거의 나는 어떻게 산을 탔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라 지금보다 더 잘 탔을지 아니면 체력이 더 좋아져서 지금 더 잘 탈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오래 전에 써 놓은 산행 기록을 보니 화엄사 입구부터 노고단 대피소까지 4시간 20분이 걸렸다. 그 때 기억으로는 너덜지대가 무척 넓었고, 너무 힘들어서 앉아서 쉬고 있는데 어떤 여자분이 상쾌하게 인사하며 내려갔던 게 기억난다. 건강해보이는 갈색 피부에 타이트한 검정 나시티, 레깅스를 입고 산을 내려가는데 표정도 몸짓도 여유로워보여 기억에 남았다. 딱 한 번 만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나보다. 심지어 나와 대화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사람.
드디어 대망의 코재! 오르기 전에 잠시 쉬어주고 계속 오른다. 물론 막판의 계속되는 오르막이 힘들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 칠선계곡에 다녀오고 며칠 전에 계룡산 동학사에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과 오르막을 올라서 면역이 되었나?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트인 길이 나왔다! 편안한 길로 편안히 20분이나 올랐을까?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도착시간이 2시가 안됐으니 레쓰비 음료수 하나 뽑아서 마시며 쉬었는데도 입실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대피소 입실은 3시부터다.)
남는 시간 동안 노고단고개에 다녀오려고 탐방 예약을 하려했는데 이런;; 오늘 예약자가 꽉 차서 더이상 예약할 수가 없었다. 시간도 남고, 여기까지 왔는데 노고단 못 가나? 우선 가서 예약하는 줄 몰랐다 그럴까? 별 생각을 다하다 현장 예약도 됐던 기억이 있어 배낭만 대피소에 넣어놓고 가볍게 올랐다.
다행히! 사전예약하지 않아도 들여보내주셨다! 한 달전에 지인들과 노고단까지만 올라왔는데 한 달만에 다시 온 노고단은 여전히 예쁘고 좋다. (처음에는 운무가 껴서 시야가 안 좋았지만 내려올 때는 쨍하고 예뻤다.)
노고단 고개에서 산 보면서 김밥도 먹고 한참 동안 있었다.
갑자기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아까 계곡길에서는 괜찮았다는데 기억이라는 녀석은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도때도 없이 날뛴다. 산에서 시작했으니 산에서 끝내는 게 맞지. 수백명의 발을 묶고 기적처럼 갔는데 그러면 나는 그 경험을 왜 했을까? 짧은 지혜로는 답인지 아닌지 모르는 채로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이지만 모든 경험에는 배움이 있으니까 내가 온전히 잘 배웠기를 바랄 뿐이다.
대피소로 돌아와서 입실! 우와!!! 노고단대피소 진짜 호텔이다 ㅠㅠㅠ 공간도 꽤 넓은데 안에서 커튼도 칠 수 있고, 개별 전등에 개별 난방,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진짜 너~무 좋다.
예전에는 옆에 누가 자는지 다 보이게 남녀 한 방에서 같이 잤다. 소백산 제2연화봉대피소에 칸막이가 생긴 것만 보고도 개인 공간에 대한 배려가 생겨 좋아했는데 점차 진화? 발전하는구나 ㅎ 국립공원 다른 대피소들도 다 이렇게 변하겠지?
대피소 안에만 있기 아까우니까 나가서 내리쬐는 햇빛, 새소리, 바람소리 안에서 커피 마시고, 양갱이랑 쿠키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동떨어져서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살짝 피곤해서 대피소 내 자리로 가서 졸다가 정신차렸는데 7시가 되어도 아직도 환하다. 오늘은 별을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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